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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광대 ‘공옥진’(孔玉振)] “옥진이는 뭣할라고 무대에만 나가면 잘 운다냐”

기사승인 2021.01.11  14: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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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리도 복 없이 참담하게 태어난 내 운명, 어쩌다 생각만 스쳐도 눈물이 절로 쏟아집니다.”

공옥진(孔玉振, 1931-2012) 여사는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157번지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의 사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배운 판소리와 최승희의 최측근에서 수련하면서 배운 무용을 훌륭하게 접목한 무용가였다.

그녀는 스스로 곱사춤이나 장님춤과 같은 독창적인 무용을 개발하였고, 판소리 다섯 바탕을 악·가·무를 겸비한 작품으로 새롭게 짜기도 했다.

樂·歌·舞 겸비, 서민 애환 풀어내는 1인 창무극

특히 판소리 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곁들여지는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은 익살과 청승맞음, 숨김없는 꾸밈새 속에서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몸짓은 서민의 애환을 풀어내는 춤이었다.

공옥진 여사는 일곱 살 적 아버지 징용비 마련 위해 돈 1,000원에 일본으로 팔려갔다. 툭하면 발길질에 죽도록 얻어 맞은데다 배까지 곯아 통통 부었던 소녀 시절, 경찰관 마누라라고 인민군에 의해 사형장까지 끌려갔다.

단가 한 자락 불러 극적으로 살아난 일…. 어디 그뿐인가. 전생에 지은 죄가 얼마나 막중하기에 요 모양 요 꼴로 살아야 하는지 업연 풀러 지리산 천은사(泉隱寺)로 입산해 삭발 했다. ‘수진 스님’으로 참선해 온 3년 7개월의 세월, 벙어리 남동생과 꼽추 조카딸을 한꺼번에 잃어야 했던 불행의 연속, 자신의 ‘창무극’을 ‘병신춤’이라 이름 붙여 마치 병신춤이나 추며 병신같이 살고 있다는 오해나 받고 있는 처지, 아직도 인간문화재 반열에 끼지 못해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들어야 하는 진심인지 약올림인지 모를 위로들….

95년 광주대 대동제 공연때 <사진=김수남 Studio Wonkyu+ 원규스튜디오 이사-공옥진 선생님 제자>

‘판소리 1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

이 시대 창무극의 단연 1인자, 공옥진 여사가 살아 온 81년의 일생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한국의 무용가. 춤·소리·연기가 어우러진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서 2010년 뒤 늦게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판소리 1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영광군의 자랑스러운 예인이다.

몸종→최승희에 사사→명창→출가→환속→공연→임방울에 사사

공옥진 여사의 할아버지 공창식(孔昌植)은 김채만(金采萬)에게 사사한 판소리 명창으로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인 협률사(協律社) 단원이었다. 아버지 공대일(孔大一)도 명창으로 1974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10세를 전후하여 몸종으로 팔려 일본의 최승희(崔承喜) 무용단체에서 허드렛일을 하였고, 이때 최승희에게 춤동작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1945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하여 1947년까지 활동하였고, 1948년 고창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장원을 하였다. 이 무렵 아버지의 뜻을 따라 경찰관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하여 한때 구례 천은사로 출가하였다가 3년이 지나지 않아서 환속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경찰관의 아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였다가 유언 삼아 소리 한 자락을 펼친 덕에 살아남았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1957년 임방울(林芳蔚) 창극단 협률사에 입단한 뒤 1960년까지 김연수(金演洙) 우리국악단, 김원술(金源述) 안성국악단 등에서 활동하면서 처녀별·바다로 가는 사람·동명성왕·장화홍련전·해방가·심청전 등의 창극에서 주역으로 공연 했다. 아버지와 김연수, 임방울로부터 판소리 흥보가·심청가·수궁가 등을 배웠다.

70년대 정병호 제안 ‘1인 창무극’ 서울 공연

1970년대에 전남 영광의 읍내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연하던 이른바 ‘병신춤’(곱사춤)이 무용학자 정병호(鄭昞浩)에게 알려졌고, 그의 제안으로 1974년 4월 서울 안국동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심청가를 공연했다. 이를 계기로 오만 가지 표정으로 몸의 관절을 꺾고 뒤틀고 푸는 곱사춤, 전통무용에 동물의 몸짓을 해학적으로 접목한 동물춤과 판소리, 연기 등이 어우러진 그의 공연은 ‘1인 창무극’(唱舞劇)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96년 공옥진 선생님과 제주도 공연때 <사진=김수남 Studio Wonkyu+ 원규스튜디오 이사-공옥진 선생님 제자>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에 걸쳐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판소리의 음악적 측면뿐 아니라 ‘아니리’(판소리에서 창을 하는 중간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사설)와 ‘발림’(판소리에서 소리의 극적 전개를 돕기 위하여 하는 몸짓이나 손짓) 등을 극적으로 발전시킨 1인 창무극을 연행(演行)하여 문화변용의 전형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서민적 한국 예술” 미·영·중·일 공연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표현하는 그의 공연은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모았다. 또 미국 링컨센터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단독 공연을 한 것을 비롯하여 영국·중국·일본 등지의 해외 공연을 통하여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그의 병신춤은 장애인을 비하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였고, 그가 펼치는 ‘1인 창무극’은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온 전통무용이 아니라 본인의 창작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2010년 5월 뒤늦게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판소리 1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뒤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명인명무’전에서 살풀이춤으로 마지막 공연을 했다.

공옥진 여사는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하였으나 2004년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가 뇌졸중이 재발한데다가 교통사고까지 겹쳐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1979년 영광군이 영광읍 교촌리에 세워준 ‘공옥진예술연수원’에서 살다가 2012년 7월 9일 “공옥진예술연수원을 공옥진기념관으로 조성해 내 예술적 흔적을 남겨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체 그 고단한 삶을 내려놓았다.

공옥진 선생님이 생전에 사용하던 악기

인간문화재도 아닌 자신에게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아그’들이 예쁘고 고마워 자신의 사비를 털어 제자들을 키웠다. 마지막까지 ‘1인 창무극 곱사춤’ 전승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광주비엔날레 공연 후 공옥진 선생님과 단체사진(1997) <사진=김하월 한국무용협회 서귀포시 지부장-공옥진 선생님 제자>

맥 끊긴 1인 창무극···기념관 건립 절실

공옥진 여사가 타계한지 올해로 9년. 마땅한 전승자를 찾지 못해 ‘1인 창무극’(곱사춤)은 공식적으로 맥이 끊긴 상태다. 전수자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념관이 없어 수십 년 동안 활동하며 쌓아온 그녀의 창무극 관련 자료도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온다. 여사의 예술적 업적을 기려 기념관을 건립하고 그녀의 유품과 자료 등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 조성이 절실하다.

공연전 공옥진 선생님께서 직접 분장해주시던 모습 <사진=김하월 한국무용협회 서귀포시 지부장-공옥진 선생님 제자>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저작권자 © 영광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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