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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의 법칙(法則) 이야기<256> 알린스키의 법칙

기사승인 2024.04.23  16:5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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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일 칼럼니스트 / 자기계발서작가

미국에 민주당으로 대통령을 지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유태인으로 급진적 사회주의자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것이다.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이면서 커뮤니티 조직 운동가인 알린스키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기상나팔》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은 사회 개혁운동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사람은 주로 이기심 때문에 행동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옳은 일은 나쁜 이유 때문에 행해지며 나쁜 일을 좋은 이유 때문에 행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타협(妥協)’은 저속한 단어가 아니라 고상(高尙)한 단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도덕성은 대부분 특정 시점의 권력관계에서 자신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알린스키가 이렇게 말한 뒤로 ‘알린스키의 법칙’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책은 1969년도에 나왔으나 1930년대부터 알린스키가 지켜온 일관된 운동 원리이며 외침 이었다. 그의 운동 원리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주의적 철저함’은 그가 다른 운동에 대해 비판 할 때 양념처럼 쓰는 주요 논리다. 

알리스키는 196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그의 말을 경청(傾聽)했으며 그를 따를 때 알린스키 역시 세상의 낙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도 일부 행동주의자들 중 신좌파 지도자들과는 관계가 서먹했다. 신좌파 학생들은 의욕이 너무 충만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 중심으로 전개해야한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알린스키는 학생 행동주의자들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의욕이 앞선 나머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일이나 자신을 발견하는데 치중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폭로일 뿐 혁명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안보고 원하는 세상만 볼까? 알린스키의 대답은 ‘사물의 양면성을 분리시켜 파악하는 인습적 사고방식 때문’ 이라고 말한다. 그는 1971년 출간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일단 있는 그대로의 세상으로 들어서고 나면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씩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버려야할 중요한 환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사물의 양면성을 분리시켜 파악하는 인습적 사고방식이다. 지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이 기능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실제 행동할 때 우리는 모든 가치와 문제들을 분할하고 고립시킨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주변에 모든 것들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생과 사처럼 그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반대 개념의 짝으로 봐야 한다. 모든 상황의 이원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조건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접근방법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사람에게는 긍정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이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알린스키는 조직가는 정치적으로는 분열적이지만 동시에 잘 융화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타협을 더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린스키는 “타협은 허약함, 우유부단함, 고매한 목적에 대한 배신, 도덕적 원칙의 포기와 같은 어두운 단어지만,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라고도 말한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일종의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나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일이다. 현재 무에서 시작했어도 100%를 요구하다가 30%선에서 타협해도 30%는 얻었으므로 남는 장사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의 연속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 멈춘다. 일단 타협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 타협 자체가 갈등이냐 타협이냐의 끝없는 밀고 당김 속에 또 다른 타협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권력의 통제는 의회에서의 대화를 통해 행정 입법 사법부 사이에서의 타협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화가 있을 때 타협이 생기고 타협이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원한다면 대화와 타협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받아들이고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는다면 서로 일치하는 지향점(指向點)에 도달할 것이다. 알린스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대화와 타협’을 강조한다. 특히 위정자들이 국리민복을 위해 대화를 한다면 만족하지는 못할지라도 타협점이 보일 것이다. 

영광군민신문 news@ygweekly.com

<저작권자 © 영광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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