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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종대왕' 일화 10가지

기사승인 2017.10.09  18: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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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성의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을 기념하는 '한글날'이다.

한글은 세종대왕 개인의 발명이 아닌 '집현전' 학자들과의 합작품이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2015년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을 주도한 한글학회 연구위원 김슬옹 박사가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글은 세종이 단독 창제한 것"이라 주장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증거로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한 신하들조차 한글을 쓰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해설한 책만을 관료들과 집필했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 의견이라 전하기도 했다.

사실 한글이 세종대왕의 단독 창제품이냐 합작품이냐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한글을 세종대왕의 덕으로 돌리는 이유는 그의 치세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한글의 보급과 활용에 백성 사랑 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이외에도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을 편찬한 '농사직설(農事直說)', 중국의 비싼 약을 사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만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 그의 시대에 편찬된 다른 저서들 또한 남다른 애민 정신을 짐작게 한다.

남다른 백성 사랑을 자랑했던 '백성덕후' 세종대왕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도 있다.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과 일화 등을 살펴보며 '세종덕후'가 되어보자.

1. 악기 연주를 잘했다

세종대왕은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위와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 태종은 열일곱 살이 되는 그에게 "너는 세자가 아니어서 따로 할 일이 없으니, 편안히 즐기기나 하여라"라며 여러 악기를 하사했다.

이때부터 세종대왕은 거문고와 가야금에 몰입하여 형들을 가르쳐 줄 수준까지 이르렀다.

실록에는 악기를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사이가 틀어졌던 세종대왕과 양녕대군이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 못 말리는 육식파였다

어린 시절부터 고기를 좋아하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성향을 가진 세종은 평생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으로 고생했다.

아버지 태종이 세종의 즉위 후 '운동'을 권할 정도였으나 고기반찬이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던 그의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삼년상 중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나 아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 몸이 상할 것을 염려한 태종은 세종에게 "고기반찬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으나 그 때문에 입맛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신하들이 "고기를 드시라"고 말할 정도였다.

3. 어린이와 노인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90세가 넘은 노비에게는 장수의 의미로 쌀 약 288kg을 제공하도록 명했다.

또한 노인들을 위해서 베푸는 잔치인 '양로연'에는 신분과 관계없이 80세 이상의 노인들은 모두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세종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정책도 펼쳤다. 의료 기관인 '제생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입양을 돕도록 명했다.

4. 2년 동안 초가집에서 살았다

조선에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세종대왕은 고통을 함께하고자 했다.

세종대왕은 경회루 동쪽에 백성들의 집과 똑같은 작은 초가집을 지어 무려 2년간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를 염려한 신하들이 세종대왕 몰래 초가집 바닥에 짚더미를 넣었는데, 이를 알고 크게 꾸짖었다.

5. 출산 휴가제를 도입했다

세종대왕은 궁에서 일하는 노비 여성이 임신하자 출산 전 한 달의 휴가를 부여해 만삭의 몸으로 일하지 않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고는 100일의 출산휴가를 제정했다. 그만큼 세종은 시대를 앞선 왕이었다.

남자 노비들 역시 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30일간의 휴가를 받아 육아를 도울 것을 명했다.

6. 안질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안질(눈이 아프면선 눈곱이 끼는 병)로 인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시력이 손상됐다.

세종실록 92권에는 "내가 눈병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됐으므로"라는 문구가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32년 가운데 20여 년 동안 시각에 장애를 느꼈고 임종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

7. 부인을 위해 분만실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은 즉위 후 장인인 심온을 숙청하게 되며 부인 소헌왕후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이후 부인 소헌왕후가 임신을 하자 경복궁에 '건강하게 순산하길 바란다'는 뜻의 '건순각'이라는 분만실을 선물했다.

8. 장애인 지원 정책을 폈다

세종대왕은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시각장애인 중 신분이 천민인 자는 재주를 시험하여 채용하도록 명했다.

또한 장애인 단체에 노비와 쌀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장애인들의 직업훈련이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다.

9. 백성들에게 왕가의 토지를 나눠주었다

연이은 흉년으로 곳곳에서 백성들의 곡소리가 들리자 세종대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수양대군을 포함한 모든 대군이 소유한 토지를 대폭 줄였고, 이 토지를 저렴한 값에 백성들에게 빌려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장려했다.

10. 민심을 알기 위해 투표를 했다

현재의 선거나 투표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당시에는 직접 민심을 확인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세종대왕은 토지법 제정을 앞두고 지역별로 관리를 파견해 약 5개월 동안 백성들을 상대로 투표를 실시했다.

토지법은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백성들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려는 세종대왕의 애민 정책이었다.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저작권자 © 영광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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