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성 시사평론가
202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기아 타이거즈 대 삼성 라이온즈 대결은 애초부터 관심을 끌 요소가 차고 넘쳤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자동차 기업과 반도체 기업의 대결, 백수의 왕인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 호남과 영남 연고팀의 대결,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타이거즈(11승)와 라이온즈(8승)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또 양팀의 선수단이나 응원단 또한 “저 팀에는 지고 싶지 않다”는 관계였기에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치열한 라이벌 구도는 팬들의 집단적 자존감과 응집력을 키우고, 후원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고 했다. 결과는 기아 타이거즈가 10월 28일 4대 1로, 2017년 이후 7년만에, 통산 12번째 우승을 차지하고 막을 내렸다.
기아 타이거즈는 많은 감동과 교훈을 남겼다. 특히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우리 정치판에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김선빈·김태군의 땀
첫째, ‘땀은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MVP(최우수선수) 김선빈(35)이다. 수상소감에서 “‘작은 선수는 안 된다’는 편견을 깨서 기쁘다”며 단신 선수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김선빈은 전국 읍단위에서 유일한 야구팀이었던 전남 화순고등학교에서 투타를 겸한 선수였다, 2008년 165cm라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기아에 들어가 우여곡절을 겪다가 2017년 타격 1위(0.370)로 ‘9번 타자 타격왕’이 됐다.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만루홈런을 친 김태군(35) 역시 남다른 노력형이었다. 그는 15년차 포수였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면서 NC 다이노스에서는 최고의 포수 양의지에게, 2021년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강민호 때문에 백업포수 겸 타자로 뛰어야 했다. 지난해 가을, 기아로 옮겨오면서 주전포수와 함께 1년만에 ‘우승포수’가 되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포수는 한 명이 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자리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포수는 항상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뭔가 이뤘을 때 뿌듯함이 더 크다”고 말했다.
‘형님리더십’ 중요성 입증
둘째, ‘형님리더십’의 승리였다. 이범호 감독(43)의 승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감독은 올 2월 단장과 감독이 그만두면서 갑자기 난파선이 된 타이거즈호 감독을 맡았다. 80년대생(1981년)으로 최초이자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감독이 됐다. 취임하면서 “선수들이 하고싶은 야구, 웃음이 있는 즐거운 야구를 하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킨 셈이다.
‘지역연고’ 정신 계승
셋째, 기아 타이거즈에는 ‘호남정신’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광주에서 야구는 ‘독립운동의 하나’라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100년 전인 1924년 6월 14일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야구팀은 재광 일본인 선발팀인 스타팀(성인 야구팀)과 광주고보 운동장에서 친선경기를 가졌다. 광주고보가 1대 0으로 앞선 가운데 끝나자 스타팀 응원단장인 안도라는 일본인이 갑자기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와 주심을 힐책하더니 다시 투수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광주고보와 일본 스타팀 응원단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됐다. 일본경찰은 안도 이마에 스파이크 자국이 있다고 하여 우리 선수 9명을 구속해 버렸다. 야구선수들이 잡혀갔다는 소문이 나자 광주시민들은 매일 경찰서에 몰려갔고, 학생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맹휴에 들어갔다. 이 맹휴는 9월까지 3개월간 계속됐으나 결국 4명이 퇴학당하는 걸로 끝났다. 이후 차별대우 등으로 3차례의 큰 맹휴가 있은 뒤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횃불이 높이 타올랐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된 이후에도 야구는 광주민중항쟁의 ‘한(恨)’을 풀어내는 통로였다. 그래 올해 우승을 한 뒤에 한 방송 캐스터는 “광주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을 야구로 극복한 도시”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기아 타이거즈 선수단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8도의 젊은이들이 모인 ‘열정 용광로’였다. 이범호 감독은 대구출신이면서도 14년간 기아 타이거즈에서 톱타자와 코치를 거쳐 올해 우승까지 이끌었고, ‘우승 포수’ 김태곤 역시 부산출신이다. 그러면서도 연고지인 광주의 정신을 지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배울만한 ‘스포츠 교과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국민은 내게 맡겨라”
우리 정치는 이런 기아 타이거즈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첫째, 정치는 8도의 선수들이 모여 ‘국가 발전의 용광로’ 역할을 해야 한다. 두 거대 정당은 국회의원을 내지 못한 상대지역에 대해 “유권자 의식이 바뀌지 않아서”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 그러지 말고 능력있는 인재를 배치하고, 성공할 때까지 밀어주어야 한다. 백업포수 김태군을 주전포수로 등용하고, 에이스 양현종이 점수를 내주자 체면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김도현으로 교체해 분위기를 과감히 바꾼 이범호의 ‘형님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이범호는 5차전 승리 뒤 조용히 박진만 삼성 감독을 찾아가 90도 인사를 했다. 박 감독도 이 감독을 포옹하며 축하했다. 승자의 겸손함과 패자의 품격이 돋보였다. 야당이 정책과 예산을 결정하는 국회의 다수당이 됐으면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들을 백번이라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 정치는 언제나 이런 스포츠정신을 따라갈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10월 29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관들과 함께 일어서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을 위해 묵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국민의 대표 공복(公僕)으로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그러나 다른 나라 일로 여겼는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둘째,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비판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태군은 선배인 양현종이 경기에 집중하지 않는 투구를 하자 “형 그렇게 던지려면 (마운드에서) 내려가요”라고 했다. 이 독설에도 불구하고 양현종은 흔쾌히 “미안하다”며 정신을 차리고 투구해 완투승을 거뒀다. 정치도 진정어린 국민의 독설을 받아들이고 개혁해야 한다.
‘구원투수’없이 정치 성공 어려워
셋째, 정치지도자는 다양한 인재들을 구원투수로 활용해야 한다. 5차전에서 보았듯이 기아 타이거즈는 좌완과 우완투수 등을 수시로 교체투입해 우승할 수 있었다. 정치도 위기에 닥치면 구원투수를 교체투입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친윤’들이 많이 있었으나 반환점에 다다르자 구원투수가 급격히 줄어든 인상이다.
야구는 비가 오면 날짜를 바꿔서 경기를 이어간다. 1차전 서스팬디드게임처럼.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대표선수이다. 그런데 내년 예산을 설명해야하는 국회 시정연설에 혹시 야당의 시위가 두려워 총리가 하도록 한다면 ‘구원투수’를 내보낸 것이 아니라 의무를 포기한 것이므로 경기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다. 중요한 시점에서 ‘대독정치’만 한다면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한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 대통령은 항상 국민 앞에 서야 한다. 돌려막기 인사나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을 계속 배치해 분란을 일으켜서도 성공할 수 없다. 민주당도 다양한 인물들의 경쟁 없이 계속 한 사람만 치켜세우다간 국민이 실망하게 된다.
‘즐거운’ 정치 해야
넷째, 정치를 응원하는 응원단도 중요한 요소이다. 정치의 응원은 여론조사로 나타난다. 올해 야구장을 찾은 관객이 1,000만 명을 넘은 것은 여성·20~30대의 증가, 가성비 높은 여가활용 문화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00만 명 가운데 기아 타이거즈 관람객은 역대 가장 많은 126만 명이었고, 굿즈 판매량도 지난해보다 250%나 늘어났다. 지지율이 낮은 정치는 정책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심해지고, 국가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활력을 잃게 된다. “돌을 던지면 맞으며 가겠다”는 걸로는 해결되는 게 아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이다. 기아 타이거즈처럼 다양한 투타운영, 형님리더십 등이 발휘돼야 지지율이 올라가고, 국민들도 희망이 보이는 정치에 반해 삐끼삐끼 춤을 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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